제주한림 금악마을 2018-01-17T22:42:40+00:00

제주한림 금악마을

금악리는 1550년경 진주강씨 일가가 동네의 북쪽에, 남양홍씨가 남쪽에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전해온다. 그 후 양씨, 박씨 그리고 김씨, 이씨, 송씨 등이 입주했다고 한다. 금악리는 4.3을 거치면서 300여호의 가옥이 없어지고 152명의 주민이 학살 되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웃동네, 중가름, 오소록이동네, 별드르, 별진밭, 새가름, 동가름 등의 마을은 복구되지 못한 채 잃어버린 마을로 남게 되었다.

하르방당

이곳의 지명은 당동산이다. 수렵(사냥, 목축) 신인 한라산 신이 호근이모루 정좌수의 딸과 결혼 후 인간세상인 금오름에 내려온 후 이곳에 좌정하여, 아들 열여덟, 딸 스물 여덟, 손자 일흔여덟을 이웃 마을에 보내어 당신(堂神)으로 좌정토록 하였다는, 주요 민속 신화 지역이다. 하르방당을 오일당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12지신 중 말의 날에 이곳을 찾아 소원을 빈 데서 유래한 것으로 지금도 그 문화가 계승되고 있다. 이곳을 방문할 때는 경건한 자세로 예를 갖추어야 한다.

오소록이 동네

“오소록하다”와 “검은매(소록이=매의 제주어)가 사는 곳”이라는 뜻이 함께 전해지는 동네이다. 4·3이 나던 1948년 음력 5월 초하루 이곳에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만이 빈 집터를 지키고 있다.

할망당

이곳의 지명은 따신머들이다. 농경신인 정좌수의 작은딸님 아기씨가 한라산신과 혼인을 한 후 금오름을 거쳐 좌정하여, 아들 열여덟, 딸 스물여덟, 손자 일흔여덟을 이웃 마을에 보내어 당신(堂神)으로 좌정 토록 하였다는, 주요 민속신화 지역이다. 할망당을 축일당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12지신 중 소의 날에 이곳에서 소원을 빈 데서 유래했다. 지금도 그 문화가 계승되고 있다. 이곳을 방문할 때는 경건한 자세로 예를 갖추어야 한다.

웃동네

잃어버린 마을 비석이 세워진 이곳은 4백여 년 전에 설촌된 유서깊은 마을로 강씨, 김씨, 박씨, 이씨, 송씨, 홍씨 등 38호에 141명의 주민들이 밭농사를 하고 우마를 키우며 정겹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1948년 11월 21일경 소개령에 의해 마을은 전소 되어 폐촌이 됐고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 협재리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 와중에 무고한 주민 8명이 희생되었다. 그 후 금악리 재건명령에도 웃동네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지금은 당시 마을 대소사를 의논하고 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하며 뛰놀던 팽나무와 월대 그리고 처참히 부서진 방에들만이 버려진 채 그 날의 비극을 대변하고 있다.

금오름

금오름은 해발 427.5m, 분화구 바깥둘레 1,200m로 금악리의 중심에 있으며 금물악 (琴勿岳, 今勿岳)·거문오름(黑岳)·금악(今岳, 琴岳)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 지금은 금오름 으로 불리고 있다. 암매라고 불리는 금오름 분화구의 서쪽능선 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한라산은 머리, 이달이 오름은 가슴, 금오름 남·북 봉우리는 무릎에 해당하는 여인의 형국이라고 한다.

진지동굴

제주도 서부지역 전체를 볼 수 있는 금오름은 지리적 요충지로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진지 동굴이 만들어졌다. 4·3때 주민들이 이곳에서 망을보다 경찰이 마을로 다가오면 붉은 깃발을, 떠나가면 하얀 깃발을 흔들어 마을에 알리기도 하였다. 진지동굴을 피난처로 이용 하기도 했지만, 마을 재건 이후 2개를 남기고 메워버렸다. 4·3을 주제로한 영화 <지슬>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포제단

마을제를 지내는 곳으로 매년 음력 정월 초 정일(丁日)을 택하여 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생이못 주변에 집을 짓고 일주일 전부터 제관들이 기거하며, 정성을 들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한 후 행하였다. 4·3으로 마을이 폐허가 되면서 중단되었으나 마을이 재건 되면서 다시 지내고 있다. 당이 주로 여성 들의 공간이라면 포제단은 남성들의 공간이다. 평소 포제단의 출입을 통제하지는 않지만 음력정월에는 마을제를 지내야하므로 평소처럼의 출입은 하지 않아야 한다.

벵듸못

넓은물 혹은 큰못이라는 의미로 한라산에 살던 멧돼지들이 내려와 땅을 헤쳐서 습지를 만들어 놀던 자리를 물통으로 만든 곳이라 한다. 목축이 성행하던 과거에는 저지, 봉성 등에서도 이 물을 소와 말에게 먹일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밭에서 돌아온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빨래를 하기도 했고, 해가 지면 처녀, 총각들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기도 했다.

동가름

동가름은 동쪽에 위치한 동네라는 의미로 4·3 당시 50여 가구가 살았으나 소개령으로 지금은 대나무 들만 남아 잃어버린 마을임을 짐작케 한다. 이 주변부터 각생이내까지 남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새가름

새가름은 새로 생긴 동네라는 의미로 주로 동가름에 살던 양씨들이 모여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처녀당에서 가족의 무사안녕을 빌며 새가름물과 각생이내를 식수원으로 사용하여 한 때는 30여 가구까지 살았다. 이곳 또한 4·3으로 잃어버린 마을이 되어버렸다.

만벵듸묘역

이곳 일대 지명이 만벵듸라서 묘역명칭을 만벵 듸묘역이라고 한다. 이곳에 안장된 영령들은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8월 20일(음7월7일) 새벽 예비 검속이란 명목으로 송악산 섯알오름 일본 군탄약고 터(현, 백조일손묘역)였던 곳에서 무참 히 학살된 무고한 민간인들이다. 유족들은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살다 6년 만인 1956년 3월에야 시신을 수습하여 이곳에 안장하였다. 당시 이 지역 희생자 수는 62명인데 이 묘역에는 46위가 안장되었다.

처녀당(아미당)

이곳은 하르방당과 할망당사이의 7남매 중 넷째 막내 딸로 태어난 처녀의 몸으로 좌정하여 당신 (堂神)이 되었다고 전해내려오는 주요 민속 신화 지역이다. 지금도 그 문화가 계승되고 있으므로 이곳을 방문할 때는 경건한 자세로 예를 갖추어야 한다. 4·3당시 이 당에 숨어있다 경찰에 잡힌 무장대 간부가 당 건너편 밭에서 자신의 가지고 있던 큰칼로 목이 베여 죽임을 당했다. 그의 시신은 밭에 버려지고 머리만이 관덕정 마당 깃대에 걸렸다고 한다.

벵듸가름

벵듸가름은 향사와 학교 그리고 풍부한 물이 있어 자연스럽게 마을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동네이다. 1919년 3·1만세운동을 기념하여 네그루의 나무를 모양으로 심었다. 4·3당시 이 나무 중 먹구슬나무에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이 매달려 고문을 당했고 며칠 후 나무들은 베어져 버리고 향사와 학교마저 불에 타 사라진다. 지금의 월대 나무들은 마을을 재건한 후 심은 나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