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안덕 동광마을 2018-01-17T22:41:48+00:00

제주안덕 동광마을

동광리는 1670년대 임씨가 정착한 이래 국영여관인 이왕원이 있었을 만큼 사통팔달한 곳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의 공출로 불만이 컸던 마을은 관리를 폭행하는 ‘공출반대사건’으로 인해 미군정이 주목하는 마을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4·3당시 많은 주민들이 끌려가 정방폭포 위에서 총살당했다. 시신들은 바다에 떠내려가거나 겹겹이 쌓여 있어서 시신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동광리는 4·3으로 인한 희생자가 160여 명 이상이다.

임문숙일가 헛묘

1948년 11월 중순 이후 큰넓궤에 숨어있던 동광리 주민들이 토벌대에게 발각되자 뿔뿔이 흩어졌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주민들은 제대로 숨지 못했고 대다수가 붙잡혀 정방폭포 위에서 학살당했다. 시신이 겹겹이 쌓여 썩어있거나 바다에 떠내려가 찾을 수 없었던 희생자 9명을 헛묘 7기로 혼백만 모셔 원혼을 위로했다. 2명은 합묘다.

무등이왓마을

동광리 5개 부락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마을로서 130여 호가 있었다. 국영목장인 7소장이 있어서 말총을 쉽게 구할 수가 있고, 대나무가 많아 탕건, 망건, 양태, 차릉 등을 만들던 제주의 대표적인 수공예품 주산지였다. 강귀봉 우영팟의 최초학살터와 잠복학살터 등이 있는데 그날의 참상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지금은 사라진 초가집 울담따라 아직도 대나무가 많아 오순도순 살았던 당시 마을 사람들의 평화로운 정경이 그려진다.

무등이왓마을 최초학살터

1948년 11월 15일 광평리에서 무장대토벌 작전을 수행하고 온 토벌대들이 동광리에 들이닥쳤다. 토벌대는 소개령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주민들을 무등이왓에 집결시켰다.
토벌대는 주민 10여 명을 호명하여 팔,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구타했는데 덜 맞아 육신이 온전했던 사람은 도망을 쳤고 나머지는 모두 이곳에서 총살당했다.

광신사숙

1930년에 설립된 동광리개량서당인 광신사숙이 있던 자리다. 학생들은 식민지 치하에서 배움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했으며 이후 동광간이 학교로 개편되어 지역 인재를 양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선생으로 김봉춘, 이두옥 씨가 있었다.

잠복학살터

1948년 12월 12일 토벌대는 자신들이 전날 학살한 양민들을 일가에서 시신을 수습하러 올 것으로 예상하고 전술훈련을 하듯 잠복해 있었다. 토벌대는 김두백 등 일가족 10여 명을 한곳으로 몰이하여 짚더미나 멍석 등을 쌓아 그대로 불을 지르는 만행을 자행했다. 울부짖는 고통 속에 화염에 휩싸여 죽어간 이들은 대다수 여성, 노인, 아이였다.

말방에터(연자방아)

말방에가 있었던 자리다. 사람들은 옛부터 말방에의 수효로 마을 규모를 짐작했다. 무등이왓에는 층 다섯 개의 말방에가 있었을 만큼 마을이 컸다. 남아있던 말방에 1기는 동광분교 근처로 옮겨갔다. 토벌대가 주민들을 살육하기 전날까지 주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이곳으로 나와서 서로 감저(고구마) 범벅을 나누어 먹으며 곡식을 갈 차례를 기다렸다.

동광분교

1948년 말경 토벌대에 의해 학교가 불타고 나서 이듬해 1월에 폐교됐다. 이후 동광교는 1949년 3월 안덕 초등학교에 흡수되었다. 4·3당시 학급 수는 1개 학년 1학급씩 (30명) 4학년까지 4개 학급으로 총 120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1교실에 2개 학년씩 복식 수업을 했으며 3명의 교사와 1명의 급사가 있었다. 소실 전 학교 규모는 3,500평 부지에 목조기와, 관사, 화장실, 물탱크, 운동장 및 1,500평 정도의 살습지 등을 갖추고 있었다. 학교 물탱크는 한동안 군인들이 매복 훈련장으로 사용했다.

삼밧구석마을

과거 주민들이 옷감, 밧줄 등을 만들기 위해 삼을 재배했다 하여 마전동으로 불리웠다. 4·3당시 임씨 집성촌으로 46가구가 살았는데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주민들은 살육을 피해 자연 은신처를 찾아 큰넓궤 등에 흩어져 살았다. 이들은 토벌대에 죽임을 당하거나 붙잡혀 이듬해 1월에 정방폭포 인근에서 모두 총살당했다. 현재 집터와 올레,우영팟이 남아 그 흔적을 엿볼 수가 있고 후손들은 그 자리에 밭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도엣궤

큰넓궤와 더불어 4·3당시 동광리 주민들이 집단으로 피난 생활을 했던 곳이다. 굴 내부는 30여 미터로 원래 큰넓궤와 이어져 있었다. 동굴 바닥에는 주민들이 가지고 갔던 생활용구 파편들이 널려있어 그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영화 ‘지슬’의 촬영 장소이기도 하다.

임씨올레

임씨네 다섯 가구가 살았다. 토벌대가 들어오기 전에 그들은 삼촌,조카 밭에서 서로 능사일을 도와 수늘음을 했고 밤에는 식께(제사)를 지내며 조상에게 술을 올려 후손의 안녕을 빌기도 했다. 올레 입구에 살던 임문숙씨 가족 5명을 비롯하여 총 14명이 희생당했다. 무명저고리를 입은 아이 웃음소리 따라강생이 (강아지) 짓는 소리가 들릴 듯하다.